네이버 영화 '그린마일' 소개 발췌
네이버 영화 '그린마일' 소개 발췌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영화로 만든 1999년 작 「그린 마일」(The Green Mile)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유명 배우 탐 행크스(Tom Hanks, 1956-)가 주연으로 출연한 이 작품에서는 1930년대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 있는 사형수동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본성의 문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 불사불멸성(immortality)의 문제, 그리고 거기에서 교차되는 선과 악의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왜 책과 영화의 제목이 ‘그린 마일’일까?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배경이 되는 교도소의 사형수동에 수감된 죄수가, 마침내 때가 되어 자기 감방에서 나와 전기의자가 있는 사형 집행장까지 걸어가는 복도의 바닥 색깔이 녹색이어서, 이를 ‘그린 마일’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이는 누구나 언젠가 걷게 될 길이다. 또 누구에게나 가장 걸어가기 두렵고 힘든 길이 될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탐 행크스는 그 사형수동의 책임 간수 역으로 나온다. 그는 아동 폭행 및 살인 혐의의 흉악범으로 체포된 거구의 흑인 죄수 존 커피를 교도소의 사형수동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존 커피가 사실은 잔인한 살인범이 아니라 무죄이며 오히려 피해자 소녀들을 도와주려다가 누명을 쓴 것임을, 그리고 그는 본래 천상으로부터 사람이 되어 온 존재, 즉 천사임을 탐 행크스는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된다, 그래서 깊은 고민을 하던 어느 날, 탐 행크스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서 존 커피가 남몰래 교도소 밖으로 도망가게끔 풀어주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때 존 커피는 자신은 이제 지쳤다고 하면서,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니, 그냥 그대로 사형 집행을 당하게끔 놓아두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를 그토록 지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지상의 삶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의 탐욕과 시기, 잔악함이었다고 고백한다. 존 커피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런데 탐 행크스는 오래도록 앓고 있던 병이 존 커피와의 접촉을 통해서 신비로이 치유되는 체험을 했는데, 이후에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전혀 몸이 아프지 않아 언제 죽을지를 결코 알 수 없는 일종의 불멸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탐 행크스는 그것이 축복이나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요 저주라고 고백한다. 남들이면 너무도 부러워할, 특히 진시황제를 비롯한 중국의 황제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불사성이 주어졌건만, 그는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 친한 친구들과 동료들을 모조리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서 쓸쓸히 홀로 남은 그에게 그러한 상태는 전혀 축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헤어져야만 했던 사별의 아픔이 너무도 컸던 것일까? 탐 행크스는 자신이 걸어가는 그린 마일이 너무도 길다고 깊이 탄식한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를 같은 양로원에서 함께 사는 어느 할머니에게 고백했던 것인데, 이제 또 시간이 지난 얼마 후 세상을 떠나간 그 할머니의 장례식을 쓸쓸히 지켜보는 주인공의 모습이 다시금 화면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불멸성이란 어떤 존재자에게 당연히 부여되는 속성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불멸성을 마치 자신의 내재적 속성이나 당연한 권리처럼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그저 지금의 이 세상에서 아프거나 죽지 않고 그냥 이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일이 설혹 가능하다고 가정해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불멸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영생(永生)이나 구원이 아니라, 탐 행크스의 고백처럼 그저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종의 형벌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의 바다에서 계속해서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니며, 존 커피가 체험했던 인간 본성의 부정적 측면을 끊임없이 체험하는 비구원의 연속적 상태가 불멸성의 본질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불사불멸성의 체험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실재이며, 인간 한계 체험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사실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 죽음의 과정을 나는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죽음 이후에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나는 죽음 너머로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 죽음 이후에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인간은 시간성과 공간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생명은 제한된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그린 마일을 걷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한평생 쌓아 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을 일시에 붕괴시킬 것이다. 인간이 죽음 너머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억’(memory)밖에 없다. 우리가 살았던 삶의 진정한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과정에서 발생한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 속에서도 한줄기 별빛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그 기억이 곧 죽음 너머의 희망이 될 것이다. 독일 신학자 기스베르트 그레사케(Gisbert Greshake, 1933-)는 말한다. “죽음의 참된 극복은 우리 삶으로부터 죽음을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을 통해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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